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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이승재 기자의 무비홀릭]“사심 없다”고 말하는 리더는 위험하다 | 2014년 07월 31일 15시 14분 54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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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도 넘은 이야기다. 당시 영화사 ‘신씨네’의 신철 대표는 요절한 무술스타 리샤오룽(李小龍)을 컴퓨터그래픽(CG)으로 복원해 영화 속에 되살려내겠다는 의욕적인 프로젝트에 몰두해 있었다. 노트북 컴퓨터의 화면을 내게 보여주면서 신 대표는 “진짜 이소룡이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알아맞혀 보라”고 주문했다. 하나는 실사영화 속 진짜 그의 얼굴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 모습을 CG로 구현한 가짜였다. “이건 왼쪽. 다음 것도 왼쪽. 그 다음 것은 오른쪽이요.” 신 대표가 매우 실망스럽게도, 나는 그가 낸 문제 세 개의 정답을 모두 맞혔다. 그러자 신 대표는 산타클로스가 존재하지 않음을 처음으로 알게 된 아이처럼 살맛 안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순간 나는 왠지 스스로가 싸가지 없게 느껴지면서 ‘한 개쯤 틀려줄 걸’이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정답을 못 맞히기도 어려웠다. ‘가짜 리샤오룽’은 진짜와 거의 똑같게 보일 만큼 완성도가 높았지만, 딱 한 개의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눈동자! 가짜는 왠지 눈동자에서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순간, 신 대표가 말했다. “그래. 눈동자가 남은 숙제야. CG로 인간의 눈동자를 완벽하게 구현해 내는 날이 바로 이소룡이 스크린에 살아 돌아오는 날이 될 거야.”

할리우드 영화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을 보면서 나는 이제 인간의 CG 기술은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 눈동자를 구현해내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CG에 대한 이런 자신감을 뽐내기라도 하듯, 이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은 심오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주인공 침팬지 ‘시저’의 눈동자를 스크린 가득 클로즈업한 장면으로 수미상관을 이룬다. CG로 구현된 유인원들의 표정 연기는 사실적인 수준을 넘어 얼마나 드라마틱한지, 얼마 전 영화 ‘그레이스 오브 모나코’에서 세기의 여우(女優) 그레이스 켈리를 연기한 니콜 키드먼의 초라한 연기 실력보다 족히 100배는 훌륭해 보였다. 예쁜 척하느라 영혼을 쌈 싸 먹어버린 니콜 키드먼은 마트에서 1만 원에 살 수 있는 바비 인형처럼 느껴졌지만, 고뇌와 애증을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담아내는 시저의 내면 연기는 단연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감인 것이다.

‘진짜인 듯 진짜 아닌 진짜 같은’ 시저의 모습이 더욱 충격적인 이유는, 유인원을 이끄는 리더로서 그가 보여주는 면모가 지금 이 땅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는 지혜롭고 신중하지만 단호하다. 권위가 있으나 권위적이지 않고, 원칙을 중시하되 원칙주의자는 아니며, 통치하되 군림하지도 않는 것이다.

수천 마리 유인원 떼의 한결같은 복종을 시저가 이끌어내는 이유는 그가 힘이 세고 무섭기 때문이 아니라, ‘이 리더 판단을 따르면 우리 모두가 안전하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무리의 집단적인 믿음 때문이다. 그래서 시저의 막강권력은 그 자신에게서 나온다기보다는 무리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생성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지며, 시저가 시종 가장 강조하는 단 하나의 단어도 ‘신뢰(trust)’인 것이다.

요즘 대한민국은 ‘비정상의 정상화’ ‘국가개조’ ‘발본색원’ 같은 단어들이 화두인지 모르지만, 놀랍게도 침팬지 시저가 어눌한 말투를 통해 반복적으로 내뱉는 단어는 ‘집(home)’, ‘가족(family)’, 그리고 ‘미래(future)’, 이렇게 딱 세 단어뿐이다. 매사를 결정하는 시저의 기준은 오로지 ‘우리의 집과 가족을 지키고 우리 무리의 미래를 위해 좋은 일인가’일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화들짝 놀랄 만한 일은 집과 가족, 미래를 판단 기준이자 통치 원리로 삼아 행동하는 이 우두머리 침팬지의 ‘원칙’이 매우 유연하게 작용한다는 점이다. 영화 속에서 인간 무리는 생존을 위한 전기를 얻고자 유인원들이 본거지로 삼은 숲 속 댐을 넘보기 시작하면서 유인원 무리와 결정적 갈등을 빚는데,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유인원을 이끄는 시저는 “인간은 믿을 만한 존재가 아니므로 이참에 공격해 없애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강경파 유인원 ‘코바’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댐에 대한 인간의 접근을 허용하는 ‘공생’을 결정한다. 이때 시저의 한마디가 명대사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인간)에겐 그것(전기)이 절실해.”

그렇다. ‘원칙’은 내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절실함’도 내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게 집과 가족이 절실하듯 남들도 그들의 집과 가족이 절실하다. 내게 이기심이 있듯 남들도 나와 똑같은 탐욕이 있음을 인정하는 데서 리더의 진짜 과업은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시저가 “유인원은 유인원을 죽이지 않는다(Ape not kill ape)”라고 강조하는 것도 ‘선악’의 시선으로 세상을 일도양단하기보단 신뢰를 통해 함께 살아가겠다는 시저 자신의 통치관이 드러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난 사심이 없다”고 밝히는 리더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리더라는 말. 사심이 없다는 게 뭔가. ‘난 사심 없으니, 사심 많은 너희는 다 죽었어’란 뜻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진정한 리더는 남들의 사심을 뿌리 뽑겠다며 정의의 칼날을 벼리는 영웅적이고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수많은 사심이 조화롭게 공존하도록 이끌면서 ‘사심의 접점’을 찾아가는 인내심 많은 존재가 아닐까.

리더여. 침팬지에게 배우시길. 강호에는 선과 악이 없음을. 강호엔 다만 수많은 사연만이 존재할 뿐임을.

이승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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